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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
 작성일시  1999.11.10 18:32:19  작성자명  최환석  조 회 수  1,216
'빠삐욘'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낯선 이름은 아닙니다. 엊그제는 서너 사람의 묽은 기억을 뒤적여 대강 그 영화의 줄거리를 읽어 보고는, 선승(禪僧)도 못되는 터수에 화두(話頭) 하나 얻은 듯, 가을밤 생각은 길어 이곳 수인들의 후진 인생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의 옷을 벗을 수 있는 자유를 '자유'라 부르지 않는다면 내밀한 집념이 각각 다른 외피를 입었을 뿐 이곳 역시 수많은 빠삐욘의 현장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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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유황색(秋有黃色), 들국화가 겨울 옷매무새를 채비하느라 금빛 단추를 여민다던 고인(古人)들의 추정은 묵향 바랜 시편(詩片)에나 남았을 뿐, 농약과 화학 비료에 얼룩진 벌판에 허수아비는 비닐옷을 입어 풍우를 근심 않는다던가…….
가까이 국화 한 송이 없어도 가을은 다만 높은 하늘 하나만으로도 일상의 비좁은 생각의 궤적을 일탈하여 창공 높은 곳에서 자신의 주소(住所)를 조감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사과장수는 사과나무가 아니면서 사과를 팔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정직한 말을 파는 세로(世路)에서 발파멱월(發破覓月), 강물을 헤쳐서 달을 찾고,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 보는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지는 계절 - 남들의 세상에 세들어 살 듯 낮게 살아온 사람들 틈바구니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가을이면 먼저 어리석은 지혜의 껍질들을 낙엽처럼 떨고 싶습니다. 군자여향(君子如嚮), 종소리처럼 묻는 말에나 대답하며 빈 몸으로 서고 싶습니다.




1980년 10월10일 대전에서 계수씨께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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