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 게시판
 제     목  십이월 이십오일 점심 밥 잘 먹고
 작성일시  2011.12.25 14:44:14  작성자명  방자  조 회 수  1,437

오늘 출근하는 길에 거리가 매우 한산했습니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도 요란한 캐럴은 들리지 않았고 잔잔하고 두꺼운 목소리를 가진 옛날 미쿡 가수가 느끼하게 노래를 합니다.


 


일요일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은 4명이 번갈아 가며 당직을 서는데, 나는 당직 운이 없는 편입니다. 금토일 또는 토일월 연휴 때 당직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고, 또 이번처럼 크리스마스 날 당직 걸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은 오늘 출근하는 게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최근 일요일마다 가톨릭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다니는데, 당직이 아니었으면 아침 미사 드리고 저녁 시간에 늘어져 있을 텐데...... 이따가 저녁 미사를 꼭 가야 하나 싶은 귀찮음 말고는 뭐,


 


한적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게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보통 당직 서는 일요일에는 점심 먹기도 어렵거든요. 노동자들이 평일에 시간내기가 어렵다보니 그런 거지요.


 


큰 아이가 곧 중학생이 되려니 이것 저것 가리는 것도 많아지고 따지는 것도 많아지고 또 바라는 것도 많아졌습니다. 그런 큰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 경제가 운영되고 일정이 잡히다 보니 둘째 아이도 점점 요구 사항이 많아지니다.


 


하여 이번 연말은 크리스마스 앞두고 돈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우선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지하철 역사 안에 광고판에서 인천 부평아트센터라는 공연장에서 "빨래"라는 뮤지컬을 한다고 했습니다. 12월 23일, 24일에 말이죠. 이거 나와 손여사는 이미 본 것입니다. 지난 가을 반도체 노동자 건강 지킴이(반올림)이라는 단체에 공짜표가 13장이나 들어왔다면서 시간 내어 같이 보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거든요. 그게 이 공연 "빨래"였습니다. 그때 6만원짜리 공연으로 들었는데, 이번 인천공연은 3만5천원이라데요. 또 회원가입하면 10% 할인하고... 게다가 처음 본 뮤지컬이었지만 상당히 재밌게 봤던 터라 돈 아깝다며 후회할 걱정도 없었고, 그리하야 애들 앞으로 표 2장을 예매했죠.


 


그리고 어느덧 큰 애들한테 옷도 신발도 필요했습니다. 초등생 같아 보이는 아동 틱 한 옷들 말고, 사촌 형들한테서 물려 받은 색 바랜 옷들도 말고, 청소년다워 보이는 옷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두 아이 모두 운동화가 닳고 닳았고 또 발이 커져서 새 운동화도 필요했습니다. 늘 길거리 가판에서 1~2만원짜리 운동화를 공급해 줬지만, 이번에는 상표 값 하는 운동화를 신켜보자는 결심을 했죠.


 


큰 아이는 처음에는 6만원짜리 운동화도 비싸다며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 매장을 둘러보더니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져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간지' 나는 신발이어야 한다고 입장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성당에서 아이들 공연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큰 아이의 준비물은 검은 색 상하의를 입고 오는 것. 하지만 큰 아이에게 맞는 검은 색 상의는 단 하나. 큰 아이는 검은 색 반팔 옷을 입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우리 부모는 (어제 상당히 췄는데) 반팔을 입혀 보낸 부모를 욕할 주위를 걱정했습니다. 결국 부모의 고집대로 옷을 입혀 아이를 성당에 보냈지만 막상 공연장에서 아이는 반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또 그리고 아이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반팔 옷에 점퍼만 걸쳐 입고는 '덥고 갑갑해서 미치겠다'며 부리던 고집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며칠 전에 눈이 높아져서 사지 못했던 운동화를 둘러보면서도 긴 팔 옷을 입히겠다는 엄마와 반팔 옷만 입겠다는 큰 아들의 다툼이 계속됐습니다. 결국 아이가 원하던 10만원짜리 운동화와 우리가 사주려던 4만5천원짜리 운동화 사이에서 서로 만족스러워 하는 6만7천원짜리 운동화를 찾아내고서도 긴팔 옷과 반팔 옷의 다툼은 계속되었죠. 그리고 자신있게 권해준 뮤지컬 공연도, 실은 내심 아이들이 과연 재미있어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두 아이 모두 공연장에 잘 적응했던 것 같아 보였고, 공연도 만족스럽게 봤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긴팔 옷과 반팔 옷의 전쟁은 끝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제, 긴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을 당부했습니다.


 


"강수야, 아빠 내일 출근한다. 알지? 여보야, 나 내일 출근하는 거 알지? 그래도 좋은 날이라는데, 서로 싸우지 말고 밥 잘 챙겨먹고 있어. 그리고 집에 청소 좀 해 놓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도 당부했습니다. 애들한테는 엄마랑 싸우지 말라고 하고, 손여사에게는 아들하고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자 손여사는 "엄마말씀 잘 들어라!"라고 말해야 맞다고 합니다.


 


그러자 큰 아이가 피식 웃습니다.


 


이젠 간지나는 것 아니면 성에 차질 않는 아이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얘들의 스타일을 이해할 수 없는데, 길에서 본 다른 청소년들하고는 또 좀 다른 스타일이고, 좀 엉성하고 촌티 나 보이는데, 그래도 얘들은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네들 성에 차지는 않았겠지만 좋아들 합니다. 싸우고 좋아하면서 큰 일 치른 듯 합니다.


 


그런 애들하고 큰 일 치르 듯 어제까지를 마쳤고 지금은 한적한 사무실에서 이러고 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겁니다.


 


 

이 전 글  방자가 혼자서 날적이 도배한다길래 나두 끄적 끄적...ㅎㅎㅎ
다 음 글  대화
이름 비밀번호
방자 2011.12.25 어, 이러다가 방자가 게시판을 도배하겠습니다. 삭제
김혜경 2011.12.25 ㅎㅎㅎ 울애들은 아직 어려서 내가 사주는옷 신발을 마다않고 신지만 강수는 암만 봐도 아빠를 닮은듯.. 더위 마니 타는거..사소한 반팔과 긴팔옷을 사는걸로 싸우는걸 보면 우리도 머지않아 그럴날이 온다는 얘긴데.. 난 애들 눈을 마니 낮춰야할듯...애들한테 너무 과소비 하는듯...이제 절약을 가르쳐야할 시기가 온듯 하네요... 삭제
방자 2011.12.26 반팔, 긴팔 옷을 샀다는 얘긴 아니구요, 오전에 애가 나갈 때 결국 긴팔옷을 입혀 보냈건만 아이는 꼼쳐 가지고 간 반팔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기에, 성당(크리스마스이브) 아이들 공연 준비하면서, 애들 공연 끝나고 신발 사러 다니면서, 그 다음에 다른 공연 보여주면서, 끝으로 집에 오면서 계속 아이가 입지 않겠다는 긴팔 옷(아이는 긴팔옷을 손에 쥐고 다녔음)을 입히겠다는 엄아와 반팔옷만 입고 다니겠다는 아이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삭제
김혜경 2011.12.26 아하.. 그 얘기였군..난 딴생각했네...ㅎㅎㅎ 삭제
재현 2011.12.27 이제 중딩이 되는 나이이면 나름 자기의 고집이 생기는 게 맞는 것 같군.. 뭐.. 스스로 적당히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봐야하지 않을까 싶네.. 삭제